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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제목

아라리로 묶인 세 여성의 우여곡절 공연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8.10.31
첨부파일0
추천수
1
조회수
896
내용

아라리로 묶인 세 여성의 우여곡절 공연기

2018-10-19 09:39

취재 : 박지현 기자  |  사진(제공) : 안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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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아리랑은 참 재밌는 민요다. 정해진 틀이 없다. 슬픈 사람이 부르면 단조 가락이 되고, 흥이 난 사람이 부르면 경쾌한 장조가 된다. 짓는 대로라 노랫말도 수천 가지다. 정선 사람들은 저마다의 아리랑을 품고 산다. 각자의 아리랑을 가진 세 사람이 만나, 결국 일을 냈다.
누군가에겐 치유였다. 어떤 이에겐 아픔이었고, 어떤 이에겐 삶 그 자체였다. 권혜경(54) 씨는 아리랑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정선으로 이사하기 전까진 그랬다. 서울의 한 잡지사에서 일하던 그는 2004년 처음 정선을 찾았다. 요양 차원이었다. 베체트병. 걸리기 전엔 몰랐던 희귀병이었다. 권 씨는 “아픈 데다 홀로 지내자니 외롭고 무서웠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장이 열린다는 얘길 듣고 정선 장터에 갔어요. 어머니들이 모여서 아리랑을 부르는데, 그 가락을 듣고 있노라니 주르르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그 자리에 서서 펑펑 울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몸에 주렁주렁 달려 있던 외로움 중 두 덩이 정도가 떨어져나간 느낌이더라고요.”

이후로 틈만 나면 정선아리랑을 들으러 다녔다. 장터는 물론 동네 마을회관, 문화예술회관을 찾아 아라리 공연을 감상했다. 그곳에서 두 젊은 여성의 공연을 보았다. 신현영(35) 씨와 최진실(31) 씨. 권 씨는 “둘의 공연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면서 “매회 찾아다닐 정도로 팬이 됐고, 관람 때마다 객석에서 눈물을 훔쳤다”고 했다.
 

세 사람, 세 가지 아리랑

무대 위 현영 씨와 진실 씨에게도 정선아리랑은 남다른 의미였다. 현영 씨 또한 ‘소리’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경기도에서 나고 자라 대학에서는 전통조리학을 전공했다. 이후 연기를 하고 싶어 무작정 대학로로 가 몇몇 무대에 섰다. 그 무렵 우연히 지인을 따라 정선아리랑 공연을 봤는데, 그게 삶이 바뀐 계기가 됐다.

“그 공연을 보고 한 1주일 동안 앓아누웠어요. 몸이 아플 정도로 여운이 깊었던 거예요. 심적으로 힘들던 시기도 아니었는데, 그렇게 반응하더라고요. 아, 정선으로 가야겠다… 정선아리랑을 해야겠다, 싶었어요.”

본능적인 이끌림이었던 셈이다. 2009년 정선아리랑예술단원으로 활동을 시작한 현영 씨는 전수장학생이 됐다.

반면 진실 씨에게 정선아리랑은 필연이었다. 정선아리랑 이수자인 그는 정선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 어머니들의 아라리 가락을 따라 하며 영재 소리를 들었다. 열망은 점차 커졌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아리랑을 제대로 배우고 싶은 사람 손드세요, 했는데 부끄러워서 손을 못 들었어요. 그런데 너무 배우고 싶어서 레코드점 앞에서 서성이며 듣곤 했죠.(웃음) 그러다 고등학교 때 정선아리랑 동아리 활동을 하며 본격적으로 노래를 불렀어요.”

2009년 예술단에 들어갔고, 2012년 <전국노래자랑> 연말 결선에서 ‘정선아리랑’으로 장원을 차지하며 가수 타이틀도 얻었다.
 

창극 <여자의 일생> 첫 공연

예술단에서 함께 활동하며 친자매 이상이 된 두 사람은 몇 해 전 예술단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본 권 씨는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는 두 사람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고 했다.

“두 친구와 인연을 맺은 것도 벌써 9~10년”이라면서 “굉장히 실력 있는 친구들인데 이젠 무대에 서지 않으니 안타까웠다”고 했다. 정선아리랑으로 묶인 세 여성이 뭔가를 도모하기 시작한 계기다. 셋은 빙 둘러앉아 머리를 맞댔다. 손엔 같은 주제를 쥐고 있었다. ‘정선아리랑의 감동을 좀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

“내가 기획한 무대에 두 사람을 올리자는 결론이 나온 거죠.(웃음) 그런데 정선아리랑 노래로만 1시간을 채우기가 좀 그런 거예요. 중간중간 상황극을 넣기로 했어요. 그러면 대본을 써야 하잖아요? 몇몇 지인에게 대본을 맡겨봤는데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아라리의 정서를 살리지 못하고 ‘극’ 자체에 치중하거나 너무 신파로 가거나 한 거죠. 그래서 이것도 저희가 직접 만들기로 했어요.”

대본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심하던 중 아이디어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권혜경 씨 이웃에 사는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정선에 와서 힘들게 생활하다 제가 의지도 하고, 존경하는 어머니가 한 분 생겼어요. 엄순분 할머니(75)예요. 글은 몰라도 정선아라리의 숱한 가락은 밤새 부를 수 있다는 분이죠. 떼꾼의 딸, 화전민이자 광부의 아내로 평생 아리랑을 부르며 지난한 삶을 사셨어요. 오며가며 들었던 엄 여사님의 삶 자체가 아라리인 거예요. 기생과 도박에 빠지고 눈까지 멀어버린 아버지, 가난 탓에 17세에 강제로 시집보내진 사연, 매일 술만 마시고 일은 하지 않는 시어머니와 줄줄이 달린 시동생들, 시할머니까지….”

‘정선아리랑 노래극 <여자의 일생>’은 그렇게 나왔다. 엄 여사 역은 진실 씨가 맡았다. 7살 순분부터 70세 인생을 모두 그려냈다. 그 외 인물은 현영 씨가 맡았다. 무려 1인 6역이다. 엄 여사의 어머니가 됐다가, 아버지가 됐다가, 동생이 됐다. 인물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정선아리랑의 특색에 따라 극에는 14곡 이상의 정선아리랑을 선보였다. 순분이 동생과 함께 뛰놀며 부르는 아리랑에서는 절로 박수가 나왔다. 어린 순분을 시집보낸 어머니의 아라리는 눈물을 쏙 뺐다. 극의 처음과 끝에는 엄순분 여사가 직접 출연해 아라리를 선보였다.

이들이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현영 씨는 “사람들이 정선아리랑이 이런 거구나, 하고 알았으면 좋겠다”면서 “공연이 끝나고 나서 관객들이 아리랑을 흥얼거리면 좋겠고, 각자 자기만의 아리랑을 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진실 씨 또한 “좀 더 많은 사람이 모든 아리랑의 어머니인 정선아리랑을 접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정선아라리는 삶 그 자체입니다. 그것을 때론 지적으로, 때론 해학과 풍자로 풀어내 사람들을 위로해주기도 해요. 어떤 때는 유장하면서도 처연한 긴 아리랑으로, 또 할 말이 너무 많아 그 속에 다 담지 못할 때는 랩처럼 빠르게 엮어서 엮음 아리랑으로, 함께 신명나게 즐기고 싶을 때는 자진아리랑으로 부르기도 하죠. 이러한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게 꿈입니다.”

첫 공연은 지난 9월 13일 SAC아트홀에서 막을 올렸다. 이날, 300 객석이 꽉 찼다.
 
 


권혜경 연출
“정선아리랑, 세대교체 이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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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경 연출

요컨대 정선아리랑에 반해버린 한 중년 여성이 정선아리랑을 기막히게 부르는 청년 둘을 무대에 세웠다는 얘기다. 권혜경 연출은 “특히 진실이는 정선 최고의 프리마돈나였다”면서 “굉장한 실력의 소유자인데, 설 무대가 없다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권 연출이 자본력이나 경험이 빵빵한 건 아니었다. 대신 인맥과 추진력은 있었다. 한때 잡지사에서 일했고, 정선의 민박집 운영, 한국여성산악회 부회장 경력 등으로 쌓은 각 분야 지인들의 ‘재능기부’ 덕이었다고 했다.

“모두가 다 뛰어들어 만들었다고 보시면 돼요. 8월 중순부터는 아예 합숙을 하면서 연습했고요. 물론 고되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신나고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들 재밌게 준비했습니다.”

권 연출은 “엄순분 여사에게는 아리랑이 한의 소리였지만 진실, 현영 세대 그리고 그 후대에서는 기쁨 등 다양한 소리로 불렸으면 좋겠다”면서 “그렇게 아라리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게 바람”이라고 했다.

“이번 공연 이후 앙코르 공연으로 지방 순회 기회까지 오면 좋겠죠.(웃음) 이 공연이 장수 공연으로 자리 잡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오는 12월 일에는 일본 오키나와에서도 공연한다. 미야코섬에 가면 위안부 아리랑 탑이 있다. 재일조선인 위문 차원이다. 권 연출은 “이 공연을 위해 출연진 몇몇이 적금까지 들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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